이번 글은 그동안 전해진 다양한 연구와 사료(『일본서기』, 고사기, 성씨록 등)뿐 아니라, 무내숙니(武內宿禰)라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 최대한 폭넓게 다룬 정리본입니다. 논자에 따라 가정하는 시기나 해석이 상이할 수 있으므로, 글 말미에 서로 다른 견해도 함께 언급합니다.
1. 명칭과 표기에 대한 기본 개념
- ‘무내숙니(武內宿禰)’의 한자 표기와 독음
- 일본에서는 “타케우치노스쿠네(たけうちのすくね)”로 읽으나, 한국 한자음으로는 “무내숙녜”, “무내숙니” 등으로 표기됩니다.
- 동북아역사재단의 한글역주본 『일본서기』는 “무내숙녜”로, 최규성 칼럼 등에서는 “무내숙니”로 칭합니다.
- 한자 ‘禰(녜)’는 한국에서 “니”, “녜”로 다양하게 읽히지만, 최규성 칼럼에서는 본래 발음과 가깝다는 이유로 “니”로 읽는 편을 취합니다.
- 이름을 둘러싼 차자(借字) 해석
- 최규성 칼럼에 따르면, ‘무내(武內)’는 “임나(任那)”와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옛 발음 [muno], [monu] 등을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.
- 기존에도 『일본서기』나 고대 문헌에서 ‘임나(任那)’라는 표기가 실제 발음 [맏나]·[말나]·[모나] 등을 옮긴 것이라는 설이 있었습니다.
- 이처럼 무내숙니(武內宿禰)의 ‘무내(武內)’가 임나(任那)의 옛 소리와 대응되며, 곧 “임나 출신이거나 그 지역의 주도권자”임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제기됩니다.
- ‘숙니(宿禰)’라는 접미사
- 최규성 칼럼에서는 고대 한국어 이름에 흔히 보이는 접미사 ‘-소/-쇠/-소이/-손이/-솜이’ 등이 한자로 바뀔 때, “宿禰(숙니)” 같은 표기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언급합니다.
- 예컨대 “을소(乙素), 을파소(乙巴素), 망소이(亡所伊)” 같은 사례에서도 -소/-소이라는 언어흔적이 보이며, “-숙니”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차자되었다고 추정합니다.
2. 『일본서기』 속 무내숙니의 위치
- 초기 천황 계보에 자주 등장
- 『일본서기』에는 신무(神武)~응신(應神)~수정(垂仁)~중애(仲哀)~신공(神功) 등 이른바 초기 또는 중고(中古) 시대 천황기에서 “무내숙니(武內宿禰)”가 빈번히 언급됩니다.
- 전통적 시각에서는 이 인물이 실존했는지, 또는 여러 세대에 걸쳐 ‘통칭’처럼 쓰인 것인지, 혹은 후세에 만들어진 신화적 인물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았습니다.
- 기존 설: 4세기경 인물로 비정
- 『일본서기』나 고사기를 토대로 연구하던 일부 학설은, 무내숙니가 가야-백제-왜 사이 전쟁이 치열했던 4세기 후반(서기 384년 근강 전투 등)에 활약했다고 보았습니다.
- 이 설에서는 무내숙니(수연이명)가 백제 근구수왕(귀수대왕)을 전사시키는 전투에 가담했으며, 이후 왜 조정에서 큰 권력을 행사하다가 반역으로 제거되었다고도 봅니다.
- 새로운 설: 500년대 중반 인물로 비정(최규성 칼럼)
- 최규성 칼럼에서는 4세기나 3세기가 아니라, ‘무내숙니’가 실제로는 6세기 중반(약 500년대)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강조합니다.
- 『일본서기』에 기록된 연대 자체가 맞지 않음을 여러 달의 월삭간지(삭일), 간지(干支) 기록을 비교하며 지적하고, 약 300년 가까운 시차가 발생했다고 주장합니다.
- 특히 “중애천황(仲哀天皇)과 신공황후(神功皇后)는 200~300년대가 아닌 500년대 중반 인물”이라는 독자적 견해를 펼치며, 무내숙니도 이들과 동시기라고 봅니다.
3. 무내숙니와 지명·인명의 상관관계
- ‘무내숙니(武內宿禰)’ ≈ ‘기각숙니(紀角宿禰)’ ≈ ‘기소궁숙니(紀小弓宿禰)’
- 『일본서기』 응신천황 3년(272년)조에는 “기각숙니(紀角宿禰)”가, 웅략천황 9년(465년)조에는 “기소궁숙니(紀小弓宿禰)”가 등장하는데, 최규성 칼럼은 이들을 본래 같은 이름으로 봅니다.
- 본래 [muno] 혹은 [monu]를 “木角(목각)”, “毛野(모야/모노)”, “木小弓(목소궁)” 등으로 잘못 표기·전사하면서, 후대에 “紀(기)”로 착각·변형되었다고 설명합니다.
- 칠지도 명문과 ‘무내숙니=무네소(旨造)’ 설
- 칠지도(七支刀) 명문 말미에 “倭王旨造(왜왕 지조)”가 등장하는데,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“왜왕 지(旨)에게 바친 칼”로 해석해 왔습니다.
- 최규성 칼럼은 이 “旨造(지조)”가 한 단어, 즉 ‘무네소(むねそ)’이며, 이는 곧 “무내숙니(武內宿禰)”와 같은 이름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봅니다.
- 따라서 칠지도 제작 연도도 4세기 후반이 아니라 6세기(양무제 연호 ‘태청(泰淸) 4년’, 서기 550년 무렵)일 가능성을 제기하여, 무내숙니가 곧 칠지도의 ‘왜왕’ 칭호와 연결된다고 주장합니다.
- 임나(任那)와 ‘무내(武內)’의 연결
- ‘무내(武內)’는 결국 [모노], [모노베(物部)], [맏나/만나/말나] 등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차자형식 중 하나로, 곧 임나 지역이나 그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고 봅니다.
- 이런 맥락에서 무내숙니(武內宿禰)는 실은 임나(任那) 내부 또는 그 인근 출신의 실력자였으며, 왜 조정 기록에선 여러 ‘천황 시대’를 관통하며 활동했다고 각색된 인물일 수 있습니다.
4. 무내숙니에 대한 주요 서사와 평가
- 반역자 또는 조정 실권자로서의 모습
- 『일본서기』 일부 내용에 따르면, 무내숙니가 왜왕실(신무~응신) 내에서 국정을 오래 주도하다가, 이복 동생(응신, 혹은 진언)을 죽이려 한 반역 설화가 전승됩니다.
- 결국 동생들이 먼저 활을 준비하여 무내숙니를 사살했다는 줄거리가 반복적으로 서술되는데, 실제 연도는 자그마치 ‘서기전 582년’ 같은 비현실적 년도로 적혀 있기도 합니다.
- 이는 3~4세기 역사를 인물 하나에 뒤섞어 “반역-제거”라는 가족드라마로 만든 대표적 사례로 여겨집니다.
- 백제와의 전투(근강 전투 설화)
- 무내숙니가 근구수왕(백제)을 전사시켰다는 전승이 있다 보니, 4세기 말(서기 384년 무렵) 근강 전투와 연결시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.
- 다만 최규성 칼럼 등은 “서기 384년” 자체가 과거 전승과 후대 기록이 뒤섞인 결과물일 수 있으며, 칠지도 명문처럼 6세기 중·후반의 사료들과 더 맞춘다면 더 후대 인물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.
- 임나·가야계 왕족 혹은 지배층으로서의 한 단면
- 무내숙니가 가야나 임나를 배경으로 활동했다는 설은, 일본서기 곳곳에 “가야계 인물”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과 결합해, “왜왕실 초기 성립에 가야·임나 세력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”는 논지를 뒷받침해 줍니다.
- 이름 자체가 임나를 가리킨다는 해석은, 그가 단순히 왜왕실의 가공 인물이 아니고, 실제로도 한반도 남부(임나)~규슈 등지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던 역사적 실체일 가능성을 열어둡니다.
- 다양한 시각 공존
- 일부 연구자는 무내숙니를 “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온 칭호적 존재”로 보거나, “한 인물이 아니라 가야·백제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합쳐놓은 상징”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.
- 반면 최규성 칼럼처럼 “500년대 중반에 활약한 단일 실존 인물이며, 칠지도 명문 ‘왜왕 지조(旨造)’가 곧 무내숙니를 말한다”는 주장도 있습니다.
- 현재로서는 해당 인물의 ‘실존 여부’, ‘시기(4세기 vs 5세기 vs 6세기)’ 등에 관해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.
5. 결론 및 의의
- 무내숙니라는 복합적 캐릭터
- 무내숙니(무네소, 지조, 기각숙니 등)는 고대 일본서 기록에서 반역자·영웅·권신 등 다면적 모습으로 묘사됩니다.
- 이름 표기 역시 무내(武內), 기각(紀角), 기소궁(紀小弓) 등 여러 차자 형태가 등장하며, 이것이 동아시아 고대 문헌 특유의 ‘겹쳐 쓰기·오독·왜곡’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가 됩니다.
- 임나(가야)와 왜왕실의 연관성
- ‘무내(武內)’를 임나(任那)로 해석하거나, 무내숙니가 “임나 출신 지배층”으로 간주되는 시각은, 일본 고대사의 초창기에 한반도 남부 세력이 적극 개입했음을 시사합니다.
- 칠지도 명문 등과 함께 검토하면, 4~6세기 한반도와 규슈 지방에서 백제·가야·왜가 치열하게 교섭·전투·교류를 이어간 흔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.
- 시대비정의 쟁점
- 전통적인 3~4세기설(근강 전투)과, 최규성 칼럼을 비롯한 일부의 6세기설(신공황후·중애천황과 동시대)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.
- 이는 『일본서기』 초기기사의 연대 자체가 곧잘 뒤섞여 있고, 후대 편찬자가 임나(가야) 세력의 역사를 왜왕실 신화에 맞게 재구성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.
- 역사적 가치
- 무내숙니라는 인물의 해석에는 여러 난제가 있지만, 그만큼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—특히 가야·백제·왜(일본)가 복잡하게 얽혔음을 보여주는 핵심 단서입니다.
- 실존 여부와 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추정되지만, 한·일 양국이 모두 주목하는 “고대사의 중요한 키워드”임은 분명합니다.
맺음말
무내숙니(武內宿禰)는 일본서기의 초기 군주 기록에 깊이 관여되어, 반역·모반·권신·전쟁 영웅 등의 다채로운 서사를 갖춘 대표적 인물입니다.
- 전통 견해: 4세기 전후(서기 384년 근강 전투 등)에 백제와 대립하면서 왜·가야 세력에서 활약, 결국 응신 등 동생에게 제거됨.
- 최규성 칼럼 등의 신설: 6세기 중반 실제 인물로서, 『일본서기』에 기록된 연대가 훨씬 과장되었고, 칠지도 명문의 “왜왕 지조(旨造)=무네소”가 바로 무내숙니.
각 견해마다 달리 보는 부분이 많지만, 무내숙니라는 존재를 통해 한·일 고대사, 특히 임나(가야)와 왜왕실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. 언젠가 더 많은 고고학적·문헌적 발견이 이루어진다면, 이 인물의 실체와 시기에 관한 퍼즐도 한층 더 또렷해질 것으로 기대합니